모악산 금산사 전경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사진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 자락의 금산사. 이곳은 인간으로 강세하신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과, 상제님의 수석성도이자 9년 천지공사의 식주인이며 대두목의 상징인 김형렬 성도의 자취와 숨결이 서려있는 성지이다. 또한 미륵불이신 상제님을 친견하고, 상제님 강세를 준비하
 며 미륵전을 창건한 진표대성사에 관한 역사적인 일화도 전해온다.
 
 미륵전의 창건과 역사
 순례자 일행은 금산사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미륵전으로 향했다. 이곳 미륵전은 진표대성사가 미륵불의 계시를 받고 중창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250년 전(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는 금산사 숭제법사에게 사미계(불교의 십계)를 받은 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돌로 두들기며 간절히 참회했다. 공부를 마치던 날 문득 천안이 열리고, 미륵불께서 수많은 도솔천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대광명 속에서 오시어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시며“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다니. 신명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내가 한 손가락을 튕겨 수미산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네 마음은 불퇴전이로다.”하고 찬탄하신다. 이후‘밑없는 시루를 걸어 놓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4년에 걸쳐 금산사에 미륵전을 완공한다.
 
 미륵전이 있는 자리는 원래 용소(龍沼)라는 깊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상제님께서 진표율사에게 그 용소 자리에‘나를 그대로 받아 세우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런데 진표율사가 아무리 흙으로 연못을 메우려 해도 메워지지 않았다. 궁리 끝에 온 사방에 눈병을 퍼트리고는 숯을 들고 와 금산사의 용소에 붓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깨끗이 낫게 하니 마침내 숯으로 가득 메워지게 되었다. 실제로 1987년에 한 토건회사에서 공사를 하려고 땅을 팠을 때도 숯이 나왔다고 한다.
 
 미륵전 앞에는 돌로 만든 연화대(蓮花臺)가 전시되어 있다. 불상은 보통 이 연화대라고 하는 연꽃 풀방석 모양의 돌 위에 세운다. 그러나 금산사 미륵불은 특이하게도 밑 없는 커다란 시루 위에 세워져 있다. 이유인즉슨 진표율사가 처음에 돌로 된 연화대 위에 미륵불상을 세우려 했는데, 자고 나면 미륵불상이 다른 곳으로 나가 떨어져 있고 또 제자리에 갔다 놓으면 다음날 다시 다른 곳으로 나가 있었다. 진표율사는 왜 이런 조화가 생기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밑 없는 시루를 받침대로 하여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다. 연화대가 불상을 받치지 않고 외딴 곳에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은 어느 절에도 없는 금산사만의 독특함이다. 시루 위에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 것은 증산 상제님의 존호인 시루 증(甑) 자와도 연관된다. 곧‘시루’에는 설익고 미완성된 선천의 모든 문명을 총체적으로 익히고 성숙시켜 만사지(萬事知) 문화를 연다는 도적 비의(秘意)가 담겨 있는 것이다.
 
 
 미륵전에 숨어있는 우주원리
 미륵전에는 증산도의 많은 도사적 의미와 우주원리가 숨어 있다. 먼저 미륵전(彌勒殿)이란 현판이 제일 위에 걸려있고, 그 밑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란 현판이 있다. 미륵님의 용화세계를 만드는 일꾼들이 모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밑의 대자보전(大慈寶殿)이란 현판은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미륵불을 자씨보살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미륵전 밑은 물이 흐르던 곳이다. 그 위에 미륵불이 세워져 있고 그 미륵불은 빨간 여의주를 손에 들고 있다(원래는 빨간 불꽃 모양의 여의주였지만 지금은 황금색으로 바뀌어 있다). 물과 불, 이는 수화(水火)운동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미륵전 건물은 특이하게도 3층으로 되어 있고, 미륵불상은 다시 조성되면서 처음에 33척(尺)1)에서 36척으로 다시 39척으로 바뀌었다. 처음의 금불에서 목불로, 목불에서 토불로 세 번 바뀌었다. 이 또한 삼변성도(三變成道)를 상징하는 우주원리가 담겨있는 것이다. 천지의 모든 일은 삼변성도로써 이루어진다. 건물 외관을 보면 앞면은 다섯 칸인 반면 뒷면은 네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은 목화토금수의 오행과 동서남북 사방위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금산사 미륵전은 건물 자체가 우주원리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미륵전 앞을 넓히는 공사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창건할 당시 미륵전 앞에 팔각당 형태의 목탑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전각 형태로 고쳐짓고 불전의 기능으로 바뀌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대장전은 미륵전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는데, 하루는 상제님께서 이런 글을 쓰셨다.
 
 世界有而此山出(세계유이차산출) 하니 紀運金天藏物華(기운금천장물화)라
 應須祖宗太昊伏(응수조종태호복)인댄 何事道人多佛歌(하사도인다불가)오
 
 세계가 생겨나고 이 산이 나왔으니 후천 (가을)문명을 여는 운수가 이 산에 갊아 있느니라. 마땅히 선천 문명의 조종(祖宗)은 태호 복희씨인데 웬일로 도 닦는 자들이 허다히 부처 타령들이냐! (道典5:282:5∼6)
 
 그리고 박공우 성도와 김광찬 성도에게 이 글을 주시면서“금산사 미륵전 앞에 대장전(大藏殿)이 있어 불편하니 너희 두 사람은 이 물목기(物目記)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대장전 석가불상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편으로 옮겨 세운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종이를 불사르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대로 따르니 후에(1922년) 증축을 하며 현재와 같은 위치에 대장전이 자리잡히면서 미륵전 앞이 넓어졌다.
 
 태호 복희씨는 단군조선 이전 배달국 환웅천황의 후손이다. 복희씨는 성씨(姓氏)의 시조요 역(易)철학의 시조이며 문자를 만들고 일부일처의 혼인제도를 세우는 등 인륜 도덕의 푯대를 세운 명실상부한 인도문명사(人道文明史)의 첫 개벽자로서 선천 문명의 조종(祖宗)이시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사실(史實)도 모른 채 뿌리를 잃어버리고 남의 조상을 꿔다가 믿으며 구원을 해달라고 열렬히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을 나무라신 것이다.
 


 
 안양동 청련암에서 보신 용봉도수 공사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안양동 청련암(靑蓮庵)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나온다. 1903년 4월 박금곡 주지에게‘龍鳳(용봉)’이라는 머리를 맞대어 쓰신 글을 써서 주신다. 그 장소가 바로 청련암이다. 용과 봉은 음양일체이다. 용은 물의 조화를 상징하고, 봉은 불의 조화를 상징한다.
 
 안양동(安養洞)은 편안할 안(安) 기를 양(養) 자를 쓰는데 안양이란 말은 극락정토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지명만을 보더라도 용봉도수 공사를 보신 이곳이 종통(宗統)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과 봉은 인사의 두 주인공을 상징하는데, 수화(水火)의 덕성을 가지고 오시는 두 분의 지도자를 나타낸다. 상제님의 진리를 바르게 알려면 상제님의 종통이 어디에 있는가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죽어서도 상제님 말씀을 지킨 김형렬 성도
 수석성도인 김형렬 성도는 상제님께 죽어도 금산사를 지키겠다고 다짐을 한다(道典10:39:8∼9). 금산사의 만인교 옆에는 그 약속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듯‘태운 김형렬 선생 등 88애국지사 충혼비’가 서 있다. 충혼비에 새겨져 있는 김형렬 성도의 함자를 보고 있노라면 말 그대로 감개(感慨)가 무량(無量)하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시면서 금산사를 대두목의 상징인 김형렬 성도에게 맡기심으로써 금산사의 핵심인 미륵불을 김형렬 성도가 지키게 된다. 1915년 김형렬 성도가 미륵불교를 여는데, 금산사 자체가 미륵불교 교단이었다.
 
 일제시대 당시에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는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이곳 김형렬 성도의 미륵불교는 김구 선생에게 직접 자금을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첫 번째 자금은 성공적으로 전달됐지만, 두 번째 자금은 불행히도 발각되어 전도자가 해외로 도피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김제의 일본 헌병대가 금산사 미륵전을 습격해 김형렬 성도 등 미륵불교 신도 88명을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그분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 충혼비이다.
 
 필자는 금산사 성지순례를 처음 왔을 때 충혼비를 보면서 이곳에 비석으로나마 금산사를 지키고 있는 김형렬 성도의 충정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자랑스럽고 충격적이었다.
 
 『도전』에서만 보던, 상상 속에서만 살아있던 상제님과 김형렬 성도의 숨결을 이렇게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영광스러웠다. 다시 안 돌아 와도 좋으니 그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상제님을 곁에서 따르던 종도가 되어 당시의 성도들과 어울려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참여했으면 하는 소망도 해본다.
 
 
 상제님과 김형렬 성도가 재회한 돌무지개문
 김형렬 성도는 젊은 시절 어린 상제님을 처음 뵙고, 동학에 종군하다 목숨을 구해주신 상제님을 흠모하던 중, 1902년 4월 4일 원평장터에서 꿈에 그리던 상제님을 다시 뵙게된다. 당시 김형렬 성도는 돈 한 냥을 빌려 식구들 먹일 양식을 사러 장터에 나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상제님을 뵙고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어렵게 빌린 돈 한 냥을 상제님의 노자에 쓰시라고 드린다. 그러면서 하운동으로 모시고자 한다. 상제님께서는 볼 일이 있어 충청도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러겠다고 약속하시고 길을 떠나신다.
 
 그로부터 9일 후 4월 13일에 이곳 금산사 돌무지개문 위에 앉으시어 하운동 쪽을 향해“형렬아∼ 형렬아∼’하고 부르신다. 잠시도 상제님을 잊지 않고 지내던 김형렬 성도는 상제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에 너무도 반가워 서전재를 넘고 금산사를 가로질러 단숨에 돌무지개문까지 달려온다. 그리고 상제님을 모시고 용화동을 지나 하운동으로 돌아들어간다.
 
 금산사의 돌무지개문은 상제님께서 9년 천지공사에서 인사(人事)의 장(場)을 여신 곳이다. 수석성도이자 대두목의 상징인 김형렬 성도를 이곳에서 부르시고 재회하신 곳이다. 9년 천지공사의 식(食)주인을 삼으신 그 김형렬 성도를 말이다.
 
 
 금산사를 돌아보며
 금산사 미륵전은 상제님께서 이 세상으로 오시고 다시 천상으로 환궁하신 곳이다. 또한 금산사는 미륵불이신 상제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놓은 곳이고, 증산도의 종통에 관한 인사문제의 핵심이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제님의 발자취를 따라, 상제님을 따르던 성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발로 밟아보라. 그리고서 다시『도전』을 받들어 읽으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이미지와 감동이 솟아나게 된다.


ⓒ증산도, 월간개벽 2007.10월호